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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싸움(鬪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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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는 10년 인연이 다 되어가는 어른 한분이 계신다. 중년에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사시는 분이다.

“나는 40대에 100억을 모으고 은퇴하는 것이 목표였지.” “그래 그 꿈을 이루셨나요?” “아니 몇 년 늦었지.” 워낙 해박하고 명쾌하신 분이라 그분과의 대화는 늘 간결했다. 월든, 마호메트, 호치민, 레닌, 쑨원, 체게바라…. 지금도 그분과 나누던 대화가 그립다. 숲에서 사는 것은 무척 고독한 일이지만, 그만큼의 보상이 있다. 인생의 진정한 Take Five!(재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5분간 휴식!’이란 의미)

 
그분이 전에 말 한 필을 사셨다. 변방에 사는 노인과 말의 이야기인 새옹지마(塞翁之馬)에서 따서 새마라고 이름을 지었다. 무척 단단하고 강한 말이었다. 새마는 마방에 입사하자마자 곧장 무리의 두목이 되었다. 말들의 두목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말들에게는 엄격한 서열이 있고, 그 서열에 따라 역할이 주어진다. 한두 필은 다른 말들이 고개를 숙여 풀을 뜯을 때 번갈아 가며 사주경계를 한다.
 
사료통을 물어뜯거나 다른 말들에게 귀를 접으며 시비 거는 버릇 나쁜 암말을 야단이라도 치려하면, 암말은 은근히 새마의 뒤로 숨어 나를 바라본다. 새마는 참 곤란한 입장이 되어 암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대개 나는 그 암말을 혼내지 못한다. 말에게도 체면은 있는 것이겠지. 
 
새마는 늘 제일 먼저, 천천히, 느긋하게, 건초를 즐긴다. 새마가 건초를 먹은 뒤에야 다른 말들도 그 뒤를 따른다. 새마가 걸어가면 말들이 좌우로 갈라서고, 새마가 달리면 무조건 따라 달린다. 서열 낮은 말들은 새마의 눈초리만으로도 경직되고, 중간 서열의 말이 건방지게 굴면 곧장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 준다. 새마는 목장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말들의 서열이 잡히면 마방은 조용해지고, 일은 쉬워진다. 새마만 데리고 나오면 나머지 말들은 자연스럽게 새마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얼마 후, 모카라는 암말이 새로 입사했다. 그 순간부터 마방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암말이 어찌나 거센지, 마방 안에서 벽을 차고 콧김을 뿜으며 다른 말들을 위협하고 협박한다. 다른 말들도 질세라 똑같이 북새통을 만든다.
 
새마는 다만 가만히 그 암말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겠지. 원래 이런 상황에서도 일반 승마장은 말들의 안전과 사고 예방을 위해 새로 온 말을 굶기거나 고된 훈련을 해서 힘을 뺀다. 다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방에 와있던 지인들과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말들을 풀어 봅시다. 자웅(雌雄)을 가려야지요.’
 
서열이 가려지지 않은 말들을 말 운동장에 풀어 놓으면 열 마리, 스무 마리가 패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묘하게도 그 무리 중의 2~3 마리가 가운데로 나서고 나머지 말들은 구석으로 밀려난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말들의 본능인 것이다.
 
성질이 꺽달진 우두머리 감 몇 두만이, 나머지 말들을 눈빛과 기세, 앙다문 이빨로 제압해서 준결승전 같은 것은 아예 벌어지지도 않는다.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자연의 법칙이 아닐까. 열 마리, 스무 마리가 다 같이 어울려 패싸움을 한다면, 그 무리는 부상이나 사망으로 소멸되고 말 것이다. 마치 중세의 장수들처럼 우두머리 감들만 앞으로 나서서 서로를 노려보는 것이다. 자연은 이 지구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영리하다. 
 
그렇게 두 필의 말은 서로를 한순간 노려보며 빙빙 돈다. 500㎏이 넘는 두 필의 말이 근육을 부들거리며 상대를 노려보고 입술을 들어 이빨을 뿌드득 거릴 때, 그 긴장감은 숲 속의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고, 그 살기(殺氣)는 30m 밖의 구경꾼들도 두렵게 만든다.
 
거대한 두 마리의 맹수가 바야흐로 격돌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순간 모카가 괴성을 지르며 앞발을 들고 허공을 젖는다. 원투 스트레이트! 새마는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모카가 착지하는 순간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는다. 그러나 모카도 같이 물어뜯어, 두 마리 모두 목에 열상(裂傷)을 입고 핏방울이 튄다. 피 냄새에 흥분한 것일까. 두 마리 말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파이널로 들어선다. 둘 다 뒤로 돌아 선 것이다. 필살의 뒷발차기. 이건 죽음을 의미한다. 진검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말의 뒷다리는 1400㎜쯤 된다. 말이 뒷다리로 허공을 차면 그 발굽이 보이지조차 않는다. 말발굽에서 떨어진 흙먼지만이 그 치명적인 무기가 다녀갔다는 궤적을 남길 뿐이다. 말의 차는 힘은 4톤이라고 하고 그 위력은 지프를 차서 넘긴다고 한다. 철판으로 된 벽이 펑펑 뚫리고, 두께 50~60㎜짜리 각목도 툭툭 부러진다. 말이 양순하기에 다행이지, 개나 고양이만 같아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맹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말을 다루면서도 늘 말 뒤로 가지 말라고 안전을 강조하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말을 놀라게 해 뒷발에 채이면 중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모카가 뒷발을 들어 새마를 찬다. 새마 역시 앞발로 땅을 단단하게 딛고 모카를 뒷발차기 한다. 전투 시간은 5~10초, 이때 주고받는 뒷발차기는 20여 회를 상회한다. 길이 1400㎜, 두께 150㎜의 두터운 몽둥이 네 개가 마구 허공을 젓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강단이 좌우한다. 말의 넓적다리가 터지고 유열이 낭자하다. 빗맞아도 길이 10㎝, 깊이 2~3㎝의 깊은 상처가 생겨난다.
 
이쯤 되면 구경하던 사람들이 당황한다. 늘 온순하던 말이라, 그저 서로 노려보다 허공에 발차기 몇 번 하고 말겠지, 하고 시작한 일이 엄청난 사건으로 번진 것이다. 말의 수의사 왕진비는 한번에 8만원, 각종 항생제와 치료받는 동안 쉬게 할 말의 손실도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린다. 치료비만 해도 200만~300만원이 훌쩍 넘는 손해에 말이 죽기라도 한다면? 하지만 합쳐서 1톤이 넘는 근육 덩어리들이, 시속 80㎞가 넘게 뛰어 다니는데 어떻게 뜯어 말리지?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을 때 생긴 일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심정이 복잡해진다. 뭔가 행동에 들어가야지! 하고 조마삭 밧줄을 잡고 말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기의 대결은 끝났다.
 
한 필의 말이 절뚝거리며 앞으로 달아난다. 순간 승마장 안 모든 생명체가 고요해진다. 산 정상에서 불어 온 바람 한줄기가 운동장을 쓸고 지나고 마른 덤불이 바람에 밀려간다. 4~5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모카는 앞발을 높이 들고 기립하며 포효한다.
 
다른 말들이 모카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말들이 갑자기 모카의 주변을 돌며 뛰기 시작한다. 이윽고 모카도 말들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뛰고, 모카의 앞에 달리던 말들이 속도를 늦추어 모카의 뒤로 따라 달린다. 새로운 우두머리의 탄생이다. 그러나 새마가 서열 2위가 된 것이 아니다. 어제까지는 새마에게 굽실거리던 서열 낮은 말들조차 새마에게 위협을 한다. 새마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새마는 왕에서 1분 만에 무리의 추방자가 되었다. 이윽고 새마는 권세를 다하고 원수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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