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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세의 골프 인문학(45)] 전쟁과 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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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경제뉴스 이인세 칼럼] 2011년 5월 1일 일요일 오후 2시04분. CIA국장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오바마 대통령이 매릴랜드의 앤드루 공군기지의 영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말고 대기중인 리무진을 타고 22킬로미터 떨어진 백악관으로 황급히 귀환한. 9홀 페어웨이에서 세컨 샷을 하려던 차에 급보를 전해들은 오바마였다. 귀환하기 전 그는 페어웨이에서 7번 아이언을 손에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후 1시 39분이었다.

2시간 전 파키스탄으로 급파된  네이버씰 특수요원들이911월드타워 테러 사건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이 숨어있는 아파트로 잠입했다는 전갈이었다. 미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알 카에다의 수장인 그를 잡기위해 보낸 세월이 전 대통령 부시의 8년까지 합쳐 꼬박 10년이었다. 이 작전은 알카에다와 벌이는 전쟁의 클라이막스와도 같았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처럼 그를 미국으로 송환시킬 것인가, 아니면 후환없이 현장에서 사살해 버릴 것인가.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납득을 시켜야 할 것인가.’ 오바마는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사안 이니 만큼 그를 현장에서 사살할 경우에 발생하는 부작용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오바마는 9번홀의 중간에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재임 기간 중 가장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입맛이 있을 리 없었지만, 그는 한손으로 골프채를 든 채 햄버거를 들고 씹었다. 비에 젖은 옷사이로 돋아오는 소름을 떨쳐 내면서 7번 아이언을 든 그는 백스윙을 하려다 말고 이내 동작을 멈추었다. 주변의 경호원들도 함께 멈추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음의 결단을 내린그는 기다리던 현장 요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명령은 즉시 파키스탄에 전달됐고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됐다.

오바마와 클린턴

오바마의 골프 사랑은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 않다. 백악관에 들어오자마자 영부인의 권유에 의해 골프를 즐긴 그는 전임 부시대통령의 2배가 넘게 골프를 쳤고, 거의 매주 한 두 차례씩 필드를 나가면서 집권 3년차에 이미 70회를 넘긴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직한 골퍼로 알려진 그는 타수를 속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벙커샷을 하면 손수 모래를 정리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이 남발 했던 멀리건도 없었다. 스스로는 보기게임 수준이라고 하면서 언젠가는 싱글 골퍼가 되리라는 생각으로 개인 레슨까지 받을 정도였다. 재선 이후에도 그의 골프 사랑은 진행형 이었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그를 미국민들은 역사이래 최고의 지지율로 아쉬워 하고있다.

아버지 조지 부시도 골프장에서 전쟁의 중대 결정을 내려야 했던 대통령이었다.  1991년 1월 17일 새벽 2시40분.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 전투기가 암흑 속 중동의 사막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무려 1천대의 비행기는 밤하늘을 별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었다.

“벙커에 있는 물 속에 볼이 들어가 있구먼, 벌타가 있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1990년 8월2일, 부시는 휴가차 메인주 해변가에 위치한 케너벙크코트 골프장에서 프로 와 함께 망중한을 즐기던 참이었다.

코치는 “비가 와서 물이 고일 때는 벌타가 없다”고 답했다. 5분 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은 부시는 한 홀이라도 더 돌기위해 안간힘을 쓰던 터였다. 국민들의 원성 때문에 지체할 수 없다는 참모의 조언에 할 수 없이 백악관으로 돌아온 그는 3주가 지나서야 처음으로 대국민 연설을 해 언론의 비난을 샀다. 언론들은 영국의 대처 총리와 제임스 베이커 미국무장관 역시 중차대 한 전쟁 발발시에 휴가중임을 보도하며 맹비난을 해댔다.

여론에 떠밀린 부시는 대국민연설을 마치고는 황급히 남은 휴가를 채우기 위해 또 다시 휴양지로 떠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골프를 치는 무리수를 두었다. 카트에 앉아 이라크 사태를 논하는 부시를 향해 언론은 군인가족들의 눈물을 오버랩 시키며 그를 연실 비난했다. 도가 지나쳤던 부시의 골프 사랑은 가문에서 비롯됐다. 할아버지가 미국골프협회의 회장을 지냈고, 부인 바브라 부시 집안에서도 골프협회장이 배출된 전통의 골프 가문이었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었던 부시의 골프 실력은 공식 시니어 대회에 참가해 71타를 칠 정도의 수준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골프를 친아이젠하워

골프를 너무도 사랑했던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연합군사령관으로 영국에 주둔할 당시, 영내 골프장을 만들어 매일 3, 4홀을 돈 뒤에 출근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뒤 프랑스의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사택으로 사용할 정도로 골프광 이었다. 한국 전쟁과도 인연이 깊었던 아이크는 6.25전쟁 당시 중공과의 교전이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에 핵폭탄을 투하하라고 명령한 미군 총사령관이었으며, 1882년 미국과의 ‘조미 통상조약’ 이후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대통령이었다.

전쟁 후 풍요로웠던 시대였던 1952년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를 미국민들은 애칭 아이크 혹은 골프대통령으로 불렀다. 그는 재임기간 중 가장 많이 골프를 친 대통령이며 8년의 임기 동안 무려 8백 번 이상의 라운딩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달 8차례, 일주일에 2번은 꼬박 필드에 나간 셈이다. 핸디캡은 싱글 수준이었다. 조지아 어거스타 내셔널을 가장 좋아해 무려 50회 이상 라운딩을 한 그는 어거스타의 17번 홀에서 드라이브로 친 볼이 매번 큰 나무를 맞추자  “저 나무를 베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농담반으로 얘기했다. 하지만 어거스타 측은 “대통령이라도 한 사람의 의견만으로 코스환경을 바꿀 순 없다”고 거절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와 최고의 골프 콤비였던 아놀드 파머는 1990년 아이크의 1백세 생일을 맞아 국회 연설을 통해 “아이크는 골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통령으로 재임시 미국 골프 인구가 2배로 증가하게 만들어 놓은 공로자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골프협회에 개인적으로 성금을 내놓으면서 기념으로 백악관의 잔디를 떠가겠다는 제안을 하자, 협회가 이를 허락하기도 했다. 백악관 오벌하우스 앞 잔디에 퍼팅장을 만든것도 그였으며,  샌드웨지로 틈만 나면 앞마당에서 어프로치 연습을 하기도 했다.

냉전의 시대 속에 소련이 미국에 앞서 지구 궤도 위성을 쏘았을 때도 휴가차 라운딩을 하던 그는 “대통령이 쉬면 국민들도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은 그를 골프 만 친다고 비아냥 거리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를 한 아이크를 너무 사랑했다. 부유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도 골프를 칠 수 있다는 생각을 그가 심어주었다고 국민들은 믿었던 때문이었다. 세계 골프연맹은 그를 ‘명예의 전당’에 헌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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