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문화비평>로보트태권V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실사판 ‘로보트 태권브이’ 제작이 무기한 연장됐다. 2008년 1월 제작발표회 이후 4년 만이다. OSEN 2월23일자 기사 ‘200억 영화 ‘로보트 태권V’, 제작 무기한 연기’는 “인기 만화영화 원작을 실사로 제작한다고 알려져 화제를 모은 영화 ‘로보트 태권브이’의 제작이 사실상 무기한 연장됐다.”고 전하며, “제작비 200억원의 SF블록버스터란 점에서 투자사들이 쉽게 결정을 못 내린다는 것이 큰 이유” “지난 해 대작들의 연이은 실패로 블록버스터에 대해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 200여억원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이라고 전했다.

꽤나 간명하고 알아듣기 쉬운 이유다. 그러나 알아듣기 쉽다고 그 이유가 납득이 간다는 건 아니다. ‘태권브이’ 제작 무기한 연장은 사실상 근래 한국영화산업에서 벌어진 가장 부조리한 사건에 가깝다. 생각할수록 어쩌다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된 건지 의아해질 정도다. ‘태권브이’는 그 자체의 성공가능성은 물론 한국영화산업 전체이익을 생각해봤을 때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콘텐트였기 때문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가장 먼저, 한국영화시장에서 로봇 서브장르는 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장르들 중 가장 충성도 높은 장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근거는 뚜렷하다. 일단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부터가 그렇다. 1편 744만531명에 이어 2009년 2편도 743만7602명, 지난해 3편은 778만4944명을 동원,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기록을 달성했다. 3부작 프랜차이즈가 700만 명대 이상이란 대성공 라인에서 이 정도 고른 성적을 거둔 예는 한국영화시장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북미시장을 제외하면 한국은 ‘트랜스포머’ 1, 2편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시장이었고, 3편은 중국에 이어 2위지만 인구대비로는 여전히 1위였다.

여기에 지난해 공개된 로봇복싱영화 ‘리얼 스틸’도 가세한다. ‘리얼 스틸’은 한국에서 357만9666명을 동원, 지난해 외화순위 5위에 랭크됐다. 21세기 들어 북미지역에서 1억 달러 이하로 벌어들인 할리우드 중박급 영화들 중 한국에서 300만 명 이상 대박을 달성한 예는 2005년 ‘아일랜드’와 ‘리얼 스틸’ 단 두 편뿐이다. 그나마 ‘아일랜드’는 영화의 유전자복제 소재가 당시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이슈와 맞물려 이변을 일으킨 경우다.

반면 ‘리얼 스틸’엔 ‘로봇’이란 콘셉트를 제외하곤 다른 셀링 포인트가 전혀 없었다. 나아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 중 국내에서 가장 높은 흥행고를 기록한 ‘아이언 맨’ 역시 수많은 슈퍼히어로들 중 유일하게 로봇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언 맨’ 1편은 431만5573명, 2편은 445만1760명을 동원, 이 역시도 프랜차이즈 충성도가 크게 증명된 바 있다. 물론 더 전으로 돌아가면 ‘아이, 로봇’ 등 여타 로봇영화들도 한국시장에서 유난히 높은 흥행을 보인 경우가 많다.

결국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아니 인구대비로 봤을 땐 전 세계에서 가장 열렬하고 충성도 높은 ‘로봇사랑’ 국가란 얘기다. 그 원인은 다양하게 지목된다. 1970년대 기술입국 천명 시점부터 시작된 테크놀로지 신앙 풍토, 1970~90년대 일본 로봇애니메이션 영향 등이 주로 거론된다. 이유야 어찌됐건, 이렇듯 폭발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서브장르시장이 존재함에도 그 시장을 모조리 할리우드에 빼앗기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참 한심한 일이다.

‘태권브이’는 바로 이 ‘아무도 손대지 않은’ 노다지시장에 들어갈 첫 번째 주자로 손색이 없었다. 인지도 차원에서나 대표성·상징성 차원에서 모두 그랬다. 그리고 할리우드가 알아서 개발해준 이 특수 장르시장을 ‘태권브이’를 기점 삼아 한국영화산업이 대체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래서 ‘태권브이’의 무기한 제작 연기는 더 뼈아픈 것이다.

다음, ‘태권브이’는 비록 200억 원대 제작비가 추산된 블록버스터 규모 프로젝트긴 했어도,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흥행 속성상 의외로 안전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근래 블록버스터 불신풍조와 투자악화를 부른 사례들을 보자. 지난해만 놓고 보면 대략 ‘고지전’ ‘7광구’ ‘마이 웨이’ 등의 실망스런 흥행이 그 ‘원흉’이 됐다. 그러나 이들과 과거 블록버스터 성공사례들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명확한 속성이 드러난다.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대부분 해당 장르를 ‘처음’ 시도하는 경우 가장 크게 터지고, 이후 같은 장르가 반복될수록 순차적으로 흥행력이 떨어져왔다는 것이다. 대표적 예가 바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상징처럼 여겨지던 전쟁 장르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가 1174만6135명을 동원하며 ‘실미도’에 이어 두 번째 1000만 신화를 달성한 후 이 장르 흥행은 꾸준히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2005년 ‘웰컴 투 동막골’이 800만8622명, 2010년 ‘포화 속으로’ 335만8960명, ‘고지전’ 294만5137명, ‘마이 웨이’ 213만9502명 순으로 연차 하락했다.

2006년 ‘괴물’로 아직까지 한국영화흥행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괴수 장르도 마찬가지다. ‘괴물’ 1301만9740명으로 극점을 친 뒤, 2007년 ‘디워’ 842만6973명, 2011년 ‘7광구’ 224만2510명 순으로 계속 떨어졌다.

반면 장르를 처음 열어젖힌 경우는 대개들 성공을 거뒀다. 재난영화 장르를 처음 연 ‘해운대’(1139만7749명), 첫 번째 한국형 슈퍼히어로물이라 홍보된 ‘전우치’(605만913명), 첫 블록버스터 급 만주 웨스턴을 표방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671만9000명) 등이 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애초 극(克)할리우드를 모토로 탄력을 얻은 상품이다. 할리우드에 대한 오랜 패배주의와 콤플렉스를 발판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 식 애국주의 마케팅을 통해 팔아치운 경우다. 국내 대중기반이 희박한 장르들까지도 말이다. 그러니 각 장르 당 효용가치는 많아야 2회, 대부분 1회로 그쳐버린 것이다. 한 번 해 본 장르는 두 번째만 돼도 벌써 ‘국민적 뿌듯함’ 차원에서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장르가 바로 로봇 서브장르다. 충분히 애국주의 마케팅, 극(克)할리우드 마케팅이 가능하다. 게다가 ‘태권브이’는 30여 년 전 우리 고유(이견의 여지는 있지만) 캐릭터로서 미국/일본 캐릭터들과 맞대결한다는 추가적 애국주의 마케팅도 가능했다. 또한 언급했듯 로봇 서브장르는 국내 대중기반이 확인된 장르다. 대중기반조차 없는 전쟁 장르, 괴수 장르도 ‘한두 번’은 성공했는데, 대중기반까지 착실히 닦여있는 로봇 장르라면 더더욱 실패율이 낮아진다.

더 중요한 건, 대중기반이 존재하는 장르의 첫 국내시도는 전쟁 장르, 괴수 장르처럼 하루 이틀 장사하고 끝나는 게 아니란 점이다. 후속타들까지 성공시키며 한동안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안정적 장르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태권브이’는 그런 식으로 현 시점 한국영화산업에 팽배한 블록버스터 불신 풍조, 그에 따른 투자악화까지 개선시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이밖에도 ‘태권브이’ 실사판이 ‘해줄 수 있었던’ 역할은 많다. 10~50대까지 모두 통용되는 다세대 상품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그 가능성을 증폭시킬 노하우 축적의 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었다. 한국서 거의 사멸되다시피 한 영화 캐릭터시장을 열어젖힐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다. 최소한도 게임산업, 만화산업 등과 연동시켜 한국형 미디어믹스의 토대를 마련해주는 역할 정도는 충분히 담당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수많은 성공 조건과 산업적 역할론을 짊어지고도 무기한 제작 연장에 들어갔다니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수많은 호조건들을 안고서도 결국 실패에 이른 경우 역시 수도 없이 많다. 전설적인 할리우드 각본가 윌리엄 골드먼의 코멘트처럼, 영화흥행이란 건 사실상 “그 누구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중국에서 나비가 한 번 날개를 펄럭여도 영국에서 영화 한 편이 망할 수 있다는 게 모든 흥행 산업의 분수령이다.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기해볼 만한 의문은 있다. 국내에서 딱히 대중기반도 없는 전쟁 장르(21세기 들어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20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전쟁영화가 단 한 편이라도 존재했나?), 거기다 ‘첫 번째’ 시도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한국형 블록버스터 흥행 속성에도 맞지 않는 전쟁 장르를 취한 뒤, 할리우드 외 지역의 블록버스터는 기본적으로 내수용이란 원칙조차 무시한 채 막무가내 글로벌 흥행 예상을 쏟아낸 ‘마이 웨이’ 같은 영화에 마케팅비 포함 250여억 원을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그보다 조건상 훨씬 안전했던 ‘태권브이’에 그 정도 투자가 이뤄지지 못할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반론도 제기될 수 있다. 이미 한국영화시장은 중급영화 중심으로 재편된 상태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세계영화시장 흐름 전체가 점차 자국현실반영률 높은 중급영화 중심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그런데 왜 굳이 200억 원짜리 블록버스터를 굳이 시도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굳이 따지고 보면 ‘마이 웨이’ 제작을 못 막은 게 문제지, ‘태권브이’ 제작을 막은 건 오히려 세계영화시장 흐름에 잘 따른 ‘선방’ 케이스가 아니냐는 것.

얼핏 말은 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만 볼 것도 못 된다. 비단 영화산업뿐 아니라 모든 산업은 ‘허리’가 강해야 튼튼한 기반이 생기는 법이긴 하다. 그러나 ‘허리’만 존재하는 산업은 또 그 나름대로 한계에 봉착하곤 한다. 영화산업 같은 전형적인 흥행산업 차원에선 특히 그렇다. 대중적 화제성이 생명인 산업에서 시장분위기를 고조시킬 화려한 스타플레이어의 역할은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수수한 ‘허리’들만으론 장기적 안목에서 시장저하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즉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 구조 블록버스터란 남발돼선 절대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어도 안 되는 존재란 얘기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태권브이’는, 현재로서 가장 위험부담이 적은, 그리고 그만큼 성공가능성이 높은, 나아가 산업 전체 흐름에 있어서도 긍정적 변화의 계기가 돼줄 수 있는 블록버스터 프로젝트였다. 만약 제작 측 능력 부족 탓에 여기까지 사태가 이른 것이라면, 보다 능력과 의욕을 갖춘 측에 실무를 일임해서라도 시급히 부활시켜야 하는 프로젝트가 맞다.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할리우드는 로봇만 등장했다 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충성스럽게 소비해주는 한국대중을 군침 흘리며 바라보고 있다. 올해도 아이언 맨이 등장한 ‘어벤저’가 개봉될 예정이고, 내년엔 흥행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연출하는 로봇영화 ‘로보포칼립스’가 등장할 예정이다. 당연히 ‘트랜스포머’ 4편도 제작시동이 걸려있는 상황이다. 지금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한국영화산업은 할리우드 로봇영화들이 한국영화시장을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앞으로도 수년 간 손가락 빨며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 SDG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지속가능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