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인세의 골프인문학 (34)] 미국의 삼인방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e경제뉴스 이인세 칼럼] 1930년대 미국의 어두웠던 공황의 시기에서 국민들에게 위안을 준 골퍼들은 바이런 넬슨, 샘 스니드 그리고 벤 호건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미국의 삼두마차로 불렀다. 1912년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였던 이들 3명은 보비 존스 등 전 세대의 계보를 이어 미국골프를 전성기로 몰고 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의 여느 프로처럼 바이런 역시 캐디를 하면서 골프장에서 밤늦은 시각에 몰래 연습을 하곤했다. 약관 20세인 1932년 프로 데뷰를 선언한 그는 3년 뒤인 1935년 첫 승을 하면서 우승 행진에 시동을 걸었다. 2년 뒤인 1937년 메이저 대회였던 마스터즈에서의 우승은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에게 ‘경’SIR라는 칭호를 붙이기 시작했다. 프로 데뷰 9년차에 그는 이미 35승에 도달했다. 절정은 10년 차가 되는 1945년, 무려 18승을 올렸을 뿐 아니라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11연승의 대기록도 달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선 골퍼도 참전하는 것이 애국이었다. 실지로 벤 호건과 샘 스니드는 자원 입대했다. 1941년 부터 1945년까지 전쟁 기간 동안 4대 메이저도 치뤄지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상황에서 바이런만 참전하지 않아 골프계 일각에서는 그를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런은 신사다운 성격으로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특히 그의 스윙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벤 호건에 앞서 ‘현대 스윙의 본보기’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4년이라는 짧은 프로 생활을 접고 넬슨은 1946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PGA는 프로선수로는 유일하게, 이례적으로 선수의 이름을 붙여 ‘바이런 넬슨 클래식’이라는 대회를 만들어 그의 명성을 기렸다. 94세의 일기로 그는 2006년 사망했다.

샘 스니드의 1937년 데뷰 시절 스윙. 1946년 마침내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영국오픈 우승을 했다

샘 스니드는 처음에는 그다지 재능있는 골퍼가 아니었다. 버지니아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골프채가 갖고 싶은 나머지 나무가지를 다듬어 골프채를 만들었다. 7살부터는 대부분 선수들이 그러했듯이 인근 골프장에서 캐디 노릇을 했다. 1934년 데뷰한 그는 1937년의 5승을 시작으로 골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대기록의 행진을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PGA에서만 82승이라는 경이적인 우승을 달성했다. 기타 대회에도 무려 69승이나 올렸고, LPGA 초청대회에서도 1승을 올렸으며 시니어 대회에서도 14승을 올렸다.  마지막 우승은 1965년 53세의 나이로, PGA대회의 최고령 우승자 타이틀도 지니게 됐다. 통산 166승으로 그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경이적인 기록을 쌓아 올렸다. 샘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PGA최다승이라는 대기록을 지니게 됐다. 늘상 테두리가 짧은 중절모를 쓰고 골프를 쳤으며 많은 스윙 교본을 쓰고 티칭을 하면서 그의 스윙을 후세에 남기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그를 바이런 넬슨과 더불어 위대한 골퍼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벤 호건이 US오픈에서 티 오프를 하고 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늦은 출발을 보인 골퍼는 벤 호건이었다. 18살인 1930년 일찌감치 프로로 전향했지만 그의 길은 멀고 험난했다. 프로 첫승을 9년 후에나 따내게 됐으니 그는 차라리 불운한 골퍼였다. 바이런 넬슨과 샘 스니드가 프로골프 인생을 즐기면서 역사를 써 나간 반면, 호건은 “진흙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골퍼”라는 언론의 표현대로 힘든 프로생활을 겪어야 했다. 대장장이었던 아버지는 호건이 9살 때 그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했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호건은 먹고 살기위해 프로로 데뷰했지만 트라우마는 늘 그의 머리속에 남아있었다.

프로 젼향 후에도 그는 배고픈 헝그리 골퍼였다. 넬슨에게는 1942년 하와이 진주만에서의 대결에서, 샘 스니드에게는 마스터즈에서 늘상 패하는 고통을 맛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1942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2년 간 군복을 입어야 하는 등 잃어버린 세월이 너무도 많은 그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1945년, 총대신 잡은 골프채로 그는 갑자기 5승을 올리면서 떠오르는 골퍼가 된다. 오히려 참전 용사로서의 잃어버린 2년이 그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넬슨이 은퇴하는 1946년에는 무려 13승을 올리면서 미국 골퍼의 우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연승 가도는 그칠 줄 모르면서 1947년에는 7승을, 그 다음 해에는 10승을 올렸다. 사람들에게 그는 불운과 좌절, 재기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의 이름은 골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상징처럼 살아있었다.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3명의 전설들이 ‘삼두마차’의 시대를 열며 21세기에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들을 달성한 것이었다.

바이런 넬슨경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동안의 얼굴로 그는 많은 팬들의 인기를 얻었다

세 선수의 스윙은 어땠을까. 골프 선수로 가장 먼저 주목을 받았던 바이런 넬슨은 큰 키, 젊잖은 매너 등 외모 덕분에 사람 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히코리에서 스틸로 샤프트가 바뀌던 시대에서 그는 스틸채에 가장 먼저 적응한 골퍼였다. 백스윙에서 다운스윙까지 전반에 걸쳐 왼무릎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도 하체는 단단히 고정시켰다. 히코리에 비해 강도가 더 세진 스틸 아이언샤프트를 지탱하기 위해 상체에서 리드하는 왼팔을 더 곧게 폈다. 하체 중에서 허벅지는 단단하게 안정시켰다. 그의 스윙은 20세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히코리와 스틸의 과도기적 시기에서 너무도 이상적이었다. 사람들은 넬슨의 스윙이 곧 스틸에 가장 잘 적응된 스윙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넬슨의 전성기 평균 타수가 68.33타인 것 만 봐도 그의 스윙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알 수있다.

샘 스니드의 스윙 역시 누구한테 교습을 받지 못한채 스스로 터득한 것이었다. 그의 스윙은 인상적이었다. 다소곳하고 차분해서 아름답기까지 한 백스윙이었지만, 다운스윙과 임팩은 총알 같은 파워를 동반했다. 19세 때부터 버지니아의 한 골프장에서 세미 프로를 맡으면서22 세인 1934년에 프로로 데뷰한 그는  자신보다 앞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바이런 넬슨을 뒤쫒기 시작했다.

호건은 키도 작고 체구도 마른 편이었다. 도저히 장타가 나오지 않을 것같던 그의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확히 장타를 쳐낸다. 비결은 하체 스윙 덕택이다. 무릎을 이용한 다운스윙의 시작 에서 임팩 구간에 다다를때 왼쪽힢과  허벅지는 이미 왼쪽으로의 이동이 아닌 뒤쪽으로 빠진다. 왼쪽 앞에 충반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아마추어들은 절대 이 공간을 만들 수 없다. 아마추어들은 왼쪽힢이  뒤로 빠지지 않고 골반을 왼쪽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아마추어 들은 힢이 좌우로 움직이지만 프로와 파워 히터들은 힢과 허벅지가 앞뒤로 움직인다. 그렇게 앞쪽에 만들어 진 공간으로 양손과 팔꿈치, 골프채가 충분히 자유롭게 지나가면서 볼을 뿌려주도록 하는것이 바로 호건이 지향한 장타의비결인 것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SDG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지속가능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