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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13)] 최초의 볼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 이인세 칼럼니스트
  • 승인 2017.11.0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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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경제뉴스 이인세 칼럼니스트] 골프볼의 시초는 어떤 것이었을까. 15세기 초원에서 목동들이 주워서 친 최초의 볼은 돌맹이었다.

그렇다면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서 썼던 볼은 무엇이었을까.

골프가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래 사용되어져 왔던 볼은 새의 깃털과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페더리볼로, 이에 대한 최초의 공식 문헌은 1486년이다. ‘리차드 클레이스(RICHARD CLAYS)라는 상인이 네덜런드에서 스코틀랜드로 한 박스의 페더리볼을 들여왔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다.

1618년 어느날 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 전용의 5홀짜리 리스골프장. 헤드 코치를 맡고있던 장인 앤드루 딕슨(ANDREW DICKSON)은 이른 아침부터 인근 양계장을 찾았다. 거위 깃털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페더리볼을 만드는 속 재료로는 거위털 만한게 없었다. 닭이나 오리털은 내구성이 문제였다. 깃털 볼을 만드는데 재주와 명성이 있었던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괴팍한 장인’이라고 불렀다. 볼을 만드는데 관한 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그는 작품을 만들다가 마음에 안들면 재료를 그대로 내동댕이 치면서 중절모 여러개에 가득 채울 만큼 거위 깃털을 허비하기도 했다. 중절모 한가득이면 한개의 볼을 만들수 있는 분량이었다.

오늘따라 마침 좋은 깃털을 구한 딕슨은 기분좋게 리스 공방으로 돌아와 펄펄 끓는 가마솥을 열고 거위털을 한무더기 집어넣었다. 순이 죽어 걸쭉하게 삶아진 깃털을 꺼내 한움큼씩 짜서 물을 뺀 다음, 미리 만들어 놓은 가죽주머니 안에 쑤셔넣는게 다음 순서였다.

가죽주머니란 볼을 만드는 바깥 주재료를 말하는 것으로, 어린 송아지나 암소의 얇고 질긴 내장이나 낭심을 잘라 여러차례에 걸쳐 백반을 입히면 찢어지지 않고 질기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주머니를 꿰메는 것이 다음 차례이다. 왁스칠을 해 단단해진 노끈으로 바늘귀에 꿰어 동그랗게 가죽 주머니를 바느질한다. 주의 할 점은 꿰메진 면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가죽을 뒤집어주는 일이다. 이때 가죽을 모두 꿰메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공간은 남겨둔다. 작은 구멍으로 걸쭉하게 삶아진 거위털을  그렇게 구겨 넣듯 채운 뒤, 남은 공간을 마저 꿰메고 말리면 비로서 가죽볼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다.

딕슨의 손놀림은 예사롭지가 않다. 볼에 예술가적 기질과 혼을 집어 넣는다는 생각에 그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했다. 볼을 말리는 마지막 과정은 더욱 정교함을 요구한다. 안에 들어간 거위 털은 마르면 팽창을 하는 반면, 겉의 가죽은 마르면 수축되는 상호 반대되는 성질로 인해 공은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진다. 주의할 점은 단단해지기 전에 손으로 천천히 굴리면서 완벽에 가까운 둥그런 모양을 만드는 일이다. 바로 장인들의 손재주가 판가름 나는 과정이다. 남은 일은 자신의 이름을 가죽에 새기는 것이다. 이틀 간 공을 말린뒤 혹여 골프장에서 비에 젖거나 워터해저드에 들어가 다시 쭈글쭈글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죽속으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붉은 페인트칠을 하기도 했다. 어려운 과정을 통해 만들어 지는 만큼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었던 관계로 귀족들이나 부호들만이 페더리볼로 골프를 즐겼고, 일반 서민들은 엄두를 못냈다. 대신 서민들은 여전히 돌맹이나 나무로 만든 볼, 혹은 귀족들이 잃어버리거나 물이 들어가 못쓰게 된 볼들을 주워 치곤했다.

비가 많고 항상 습기가 차 있는 스코틀랜드 날씨의 특성상 페더리볼은 항상 골프장에서 문제거리였다. 클럽으로 찍혀 맞았을 때는 금새 찢어졌고, 물에 젖으면 팽창돼 있었던 깃털이 안에서 쪼그라들어, 볼은 으깨진 토마토처럼 푸석푸석하게 변해 버렸다. 이 때문에 골퍼들은 적어도 하루 분량으로 대여섯개의 볼은 들고 나가야 했다. 수요는 많은데 제조는 한정되어 있었다. 하루에 장인 한사람이 만드는 볼의 갯수는 기껏해야 4개 내지 5개 정도에 불과했다. 높은 사람들로부터 제조업자들이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힘든 공정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페더리볼을 만드는 장인들은 왕실이나 귀족들에 의해 지정되면서 가문을 이어 혜택을 받는 수혜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지역마다 독점으로 볼을 생산했다. 

어렵게 만들어진 페더리볼은 비거리가 얼마만큼이나 멀리 날아갔을까. 대략 1백50에서 1백80야드는 족히 나갔고, 딱딱하게 굳어져 돌덩이 같지만 가벼웠던 탓에 뒷바람을 타면 2백야드 이상도 가능했다. 불행히도 17세기의 페더리볼은 아직까지 원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극히 드물다. 보존 상태가 완벽하면 싯가 2억 원은 홋가하는데 현재 경매되는 페더리볼들은 대개 1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페더리 볼을 만드는 장인들은 명성의 뒤안길에서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가죽볼은 수백 년 간 골프의 화두였다. 장인들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비싼 댓가를 치러야 했다. 거위 깃털을 만질 때 생기는 고유의 발암물질이 폐렴이나 폐암을 유발했고, 대다수의 장인들이 폐렴으로 사망했다. 가장 많은 볼을 만든 알렌 로버트슨(ALLEN ROBERTSON)도 예외없이 폐암을 동반한 황달로 죽었다. 평생 총 2천4백56개의 공을 만든 것으로 기록돼 있는 그 역시 6대 째 왕실 전용 볼을 만들어 오던 전통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장인들만이 겪는 불행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볼과 클럽 제조업자였던 장인들은 훗날 자연스럽게 프로 골퍼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신흥계층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굳혀가는 혜택까지 입고 있었다. 그렇게 수 백년 간 골퍼들과 함께한 가죽볼은 1848년을 끝으로 새로 발명되어진 값싸고 만들기 쉬운 혁명적인 고무공으로 인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인세 칼럼니스트  308j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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