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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 입력 2017.04.09 18:53
  • 수정 2017.04.09 19:47

남한강 물길따라 가본 '단양적성비'와 '온달산성'

국립중앙도서관 '인문열차,삶을 달리다' 탐방프로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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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경제뉴스 장은재 기자] 4월의 봄은 남한강 강바람처럼 달리는 열차 속으로 흠뻑 쏟아졌다.

싱그러운 새 봄에 삶의 여유와 혜안을 주는 ‘인문열차,삶을 달리다’라는 생활속의 인문학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주최하는 이 프로그램은 주제별 강연과 현장탐방으로 이루어진다.
 
임기환 교수
지난 3월 29일에는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가 이 프로그램의 두 번째 행사로 ‘물길과 고개 길에 남은 역사와 설화-남한강’을 주제로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지하3층 대회의실에서 강연을 가졌다.
이어 4월8일 같은 주제로 열차와 함께 하는 인문학 현장 탐방행사가 열렸다. 그래서 ‘인문열차’였다. 오전 7시50분 청량리에서 단양행 ITX열차를 탔다.
 
이날 현장 탐방은 ‘단양적성비’와 ‘온달산성’ ‘미륵리사지’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었다. 60명이 참석했다. 중장년 부부가 많았다.
 
열차 한 칸을 빌려 청량리를 떠나 단양까지 약 2시간여 달리며 상큼한 ‘한국의 새봄’을 느꼈다. 단양역에 내린 뒤 2대의 버스에 일행이 나눠 옮겨 타고 먼저 찾은 곳이 ‘단양적성비’다.
 
임기환 교수(가운데)가 탐방자들에게 현장 강의를 하고 있다.<사진/장은재 기자>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의 단양적성비는 국보 198호로 지정돼 있다. 주변에 축조된 적성은 사적 265호로 지정돼 있다. 신라 진흥왕 545~551년경에 축조된 산성이다. 해발 323.7m 성산 정상부에 약900여m 둘레로 축조됐으나 현재 일부만 남았다. 긴 타원형 말안장 모습을 하고 있다.
 
단양 적성.말안장 모양의 테뫼식 석축산성이다.<사진/장은재 기자>
 이 성은 당시의 신라와 고구려간 세력관계 변동을 알아보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현장 강의를 맡은 임기환 교수는 말했다. 축성방법이 아주 견고하여 신라의 축성기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적성은 군데 군데 붕괴되고 있어 보호장막을 쳐둔 곳이 눈에 띄었다. 둘레 900m였는데 현재 절반도 안남아 있었다.
 
단양 적성의 모습. 돌과 진흙으로 다지고 외벽을 자연석으로 엇갈리게 쌓았다.<사진/장은재 기자>
적성비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을 선무한 표적으로 세웠다. 비에는 이사부,비차부,무려등 신라고관 10명의 이름이 적혀 있어 주목된다. 신라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를 축출하고 첫발을 디딘 요충지에 성곽을 축성하고 업적을 기념한 비는 신라인의 긍지와 포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국보 제198호 단양적성비.<사진/장은재 기자>
 두 번째 탐방장소는 '온달산성'이었다.
온달은 우리가 잘 아는 온달장군설화의 주인공이다. 평강공주의 남편이다. 온달은 실존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있는 온달산성은 사적 제264호로 신라 석축산성의 방법으로 축성된 것이 확인되어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역사학계는 보고 있다.    
온달산성 모습.<온달공원 관리소 제공>
출토된 유물로 보아 6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는 온달산성은 해발 427m 에 있다. 산성을 오르기에 매우 가파르다. 숨이 헐떡 거렸다. 몇몇 탐방객은 산성을 오르다 중도에서  포기하기도 했다.
 
온달산성 가는 길<사진/장은재 기자>
 온달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온달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이곳은 고구려와 수-당 시대 궁성을 재현한 드라마 세트장이 있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산성은 성산 정상부는 반월형으로 축조됐다. 산성의 북동쪽 아래에는 4억5천만년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온달동굴(천연기념물 제261호)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산성주위에는 온달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고구려 궁성 모습의 드라마촬영 세트장.<사진/장은재 기자>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죽령 이북의 우리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며 출정했으나 신라와 전투중에 화살에 맞아 아단성(온달산성)에서 전사했다. 전사한 그를 장사 지내려 했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가 결판났으니 편히 돌아가시라”고 하니 그제서야 관이 들리었다는 설화도 전해져 온다.
 
온달산성 오르는 길목에 설치된 고구려 궁성 모습의 드라마촬영 세트장.<사진/장은재 기자>
 온달의 영웅적 최후와 평강공주와의 사랑이야기는 오늘날에게도 생명력 있게 전해지는 것은 깊은 충정심과 일편단심 사랑이 주는 교훈의 힘일 것이다.
세 번째 탐방지는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 사지.
온달산성에서 버스로 1시간30분간 달려서 찾아갔다. 사적 제317호인 이 곳은 고려시대 절터로 하늘재라고 하는 환훤령을 넘어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접하고 있었다.
 
미륵여래석불 모습(미륵리사지 안내판 촬영) <사진/장은재 기자>
보수공사중인 미륵여래석불.석불이 서있는 자리에 석불사진의 가림막이 쳐져있다.<사진/장은재 기자>
고려시대 이름은 대원사. 미륵리사지에는 보물 제96호인 미륵여래석불과 보물 제95호인 오층석탑과 석등, 돌거북,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어 당시의 번성했던 사찰규모를 짐작하게 했다.
 
미륵리 사지를 탐방한 날,  공교롭게도 미륵여래석불은 2018년까지 보수공사 중이라고 했다. 커다란 미륵여래석불이미지 사진이 석불을 대신하고 있어서 석불 그 자체를 볼 수 없었다. 5월초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부처님오신날을 준비중인 승려들이 색색의 연등을 경내에 걸고 있었으며 찬불가가 은은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사지 입구에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고정시키는 거대한 당간지중는 6엽 연화문이 양각되어 놓여져 있었다.
 
당간지주.<사진/장은재 기자>
  미륵여래석불은 높이 10.6m에 이르는 거대한 석불로 모두 4개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굴을 금당으로 삼아 북향하고 있는 유일한 유적으로 문화적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곳에도 슬픈 전설이 있다.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다. 전설이 얽힌  길을 오가며 신라 마지막 태자와 공주가 가진  망국의 한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인문학 현장탐방은 잠시 잊었던 우리 역사속의 설화를 듣고 현장을 직접 보면서 당시의 삶과 정치, 그리고 사랑을 통해 오늘을 성찰하게 했다. 남한강 주변 곳곳은  승패의 역사와 슬프고 아름다운 설화가 흐르는 물길처럼 살아 있는 곳이었다.
 
보물 제95호 미륵리 사지의 오층석탑.<사진/장은재 기자>
남한강은 물길 뿐만 아니라 연결된 땅길을 통해 한반도 동쪽과 남쪽으로 잇는 교통로의 뿌리로 삼국시대 격렬한 쟁탈전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주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강연과 탐방 프로그램을 올해 연말까지 8차례 진행할 예정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인문열차'  다음 탐방은 5월13~14일 1박2일코스다. 경남 산청,함양,하동을 방문하여 ‘지리산이야기-선인들의 지리산 인식'에 대해 경상대 최석기 교수로부터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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